시인 詩 모음

나무 시 모음

효림♡ 2011. 5. 25. 08:40

* 나무 - 박목월 

  유성(儒城)에서 조치원(鳥致院)으로 가는 어느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그루 늙은 나무를 만났다.

수도승(修道僧)일까. 묵중(默重)하게 서 있었다. 

  다음 날은 조치원(鳥致院)에서 공주(公州)로 가는 어느 가난한 마을 어귀(於口)에 그들은 떼를 져

몰려 있었다.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어설픈 과객(過客)일까. 몹시 추워 보였다. 

  공주(公州)에서 온양(溫陽)으로 우회(迂廻)하는 뒷길 어느 산마루에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하늘문(門)을 키는 파수병(把守兵)일까, 외로워 보였다.  

 온양(溫陽)에서 서울로 돌아오자, 놀랍게도 그들은 이미 내 안에 뿌리를 펴고 있었다.

묵중(默重)한 그들의. 침울(沈鬱)한 그들의. 아아 고독한 모습. 그 후로 나는 뽑아낼 수 없는 몇 그루의

나무를 기르게 되었다. *

 

* 소식 - 이성선

나무는 맑고 깨끗이 살아갑니다

 

그의 귀에 새벽 네 시의

달이 내려가 조용히

기댑니다

 

아무 다른 소식이 없어

바라보고 있으면 눈물이 납니다 *

 

* 나무 - 박남수

나무는 뛰기 시작했다.

한동안

신록(新綠)의 분수(噴水)로

하늘을 향해 뿜고 있더니,

이윽고 나무는

향기로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조용한 여울을 지우며

애기의 눈가를 간지리어서

결국 터지는 웃음이 되었다.

그후는

낮잠을 자고 있었을까.

전신(全身)으로 흔드는

지지지 노래를 울리면서

눈부신 빛깔ㅡ밝안 빛깔이

땅으로 투하(投下)되어

메마른 땅 속에서 폭발(爆發)하고

나무는 사방(四方)으로 뛰기 시작했다. *

 

* 상수리나무 - 이재무

애써 가꾼 한 해 양식을

지상으로 돌려보낸 뒤

한결 가벼워진 두 팔 들어올려  

하늘 경배하는 그대들이여

 

주머니 속

때묻은 동전에 땀이 배인다 *

 

* 내게는 느티나무가 있다 1 - 권혁웅

느티, 하고 부르면 내 안에 그늘을 드리우는 게 있다
느릿느릿 얼룩이 진다 눈물을 훔치듯
가지는 지상을 슬슬 쓸어담고 있다
이런 건 아니었다, 느티가 흔드는 건 가지일 뿐
제 둥치는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느티는 넓은 잎과 주름 많은 껍질을 가졌다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발음하면
내 안의 어린것이 칭얼대며 걸어온다
바닥이 닿지 않는 쌀통이나
부엌 한쪽 벽에 쌓아둔 연탄처럼
느티의 안쪽은 어둡다 하지만
이런 것도 아니다, 느티는 밥을 먹지도 않고
온기를 쐬지도 않는다
할머니는 한번도 동네 노인들과 어울리지 않으셨다
그저 현관 앞에 나와 담배를 태우며
하루 종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런 얘기도 아니다, 느티는 정자나무지만
할머니처럼 집안에 들어와 있지는 않으며
우리 집 가계(家系)는 계통수보다 복잡하다
느티 잎들은 지금도 고개를 젓는다
바람 부는 대로, 좌우로, 들썩이며,
부정의 힘으로 나는 왔다 나는 아니다 나는 아니다
여기에 느티나무 잎 넓은 그늘이 그득하다 *

 

*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 김선우 

  서른 해 넘도록 연인들과 노닐 때마다 내가 조금쯤 부끄러웠던 순간은 오줌 눌 때였었는데 문 밖까지 소리 들리면

어쩌나 힘 주어 졸졸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 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 보던 것인데

 

  마흔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오동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누게 된 것이었다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 여자들 사이, 나도 편안히 바지를 벗어내린 것인데

 

  소리 한번 좋구나! 그중 맏언니가 운을 뗀 것이었다 젊었을땐 왜 그 소릴 부끄러워했나 몰라, 나이 드니 졸졸 개울물 소리

되려 창피해지더라고 내 오줌 누는 소리 시원타고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딸애들은 누구 오줌발이 더 힘이 좋은지, 더 넓게, 더 따뜻하게 번지는지 그런 놀이는 왜 못하고 자라는지 몰라,

궁금해하며 여자들 깔깔거리는 사이

 

  문밖까지 땅 끝까지 강물소리 자분자분 번져가고 푸른 잎새 축축 휘늘어지도록 열매 주렁주렁 매단 오동나무가 흐뭇하게

따님들을 굽어보시는 것이었다 *

 

* 나무 - 윤동주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오. *

 

* 나무에 대하여 - 정호승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 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

 

* 열병(熱病) - 문태준  

퀴퀴한 방 한구석에 모과를 쌓아둡니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탱자나무 울타리에 엉켜 꽃이라도 피우려 합니다

 

젖은 발을 뜨락에 얹다 말 붙일 곳 없어 감나무에 말을 건넵니다

 

감나무는 끝이 까맣게 탄 감꽃을 떨구어 보입니다

 

사람에 실성한 사람을 누가 데려 살까요

 

늘그막 젖무덤 같은 두꺼비가 그늘을 따라 길게 옮겨갑니다. *

 

* 나무 학교 - 문정희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푸른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놓을 때
사랑한다!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하며 나무를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 

 

* 겨울나무 - 김영무

사람들이 옷을 껴입는 겨울에

왜 나무들은 옷을 벗을까

 

둥근 어깨며 겨드랑이

가지끝 실핏줄까지

청산리 자작나무는 왜 홀랑 드러내는가

 

눈송이 펄펄 꽃허럼 날리는 한밤중

춤출 수 없는 몸이라면 차라리

꼿꼿이 서서 얼어죽겠다?

 

깨질 듯한 하늘

찬바람 등등한 서슬에

낮달이 썩썩 낫을 가는 속수무책의 대낮,

 

겁먹고 숨죽인 봄햇살 유혹하려면

어쩌란 말이냐

무등산 겨울나무는 알몸의

신부가 되는 수밖에. *

 

* 나무에게 말을 걸다 - 나태주

우리가 과연

만나기나 했던 것일까?

 

서로가 사랑한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때가 있었다

가진 것을 모두 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다

 

바람도 없는데

보일 듯 말 듯

나무가 몸을 비튼다. *

 

* 고목 - 복효근

오동은 고목이 되어갈수록
제 중심에 구멍을 기른다
오동뿐이랴 느티나무가 그렇고 대나무가 그렇다
잘 마른 텅 빈 육신의 나무는
바람을 제 구멍에 연주한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아니랴
수많은 구멍으로 빚어진 삶의 빈 고목에
어느 날
지나는 바람 한 줄기에서 거문고 소리 들리리니
거문고 소리가 아닌들 또 어떠랴
고뇌의 피리새라도 한 마리 세 들어 새끼칠 수 있다면
텅 빈 누구의 삶인들 향기롭지 않으랴
바람은 쉼없이 상처를 후비고 백금칼날처럼
햇볕 뜨거워 이승의 한낮은
육탈하기 좋은 때

잘 마른 구멍하나 가꾸고 싶다 *

* 고규홍저[나무가 말하였네]-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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