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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박형준

효림♡ 2011. 10. 21. 08:37

*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박형준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 시집

아버지 돌아가신 날

새 시집이 나왔다

평생 일구던 밭 내려다뵈는 무덤가

관 내려갈 때 던져주었다

 

관 위에 이는 바람

몇 페이지 후루룩 넘어가고

호롱불 심지 탁탁 튀는 소리

건너편 탱자나무 집

달빛에 낭창낭창 휘던 대나무 밭

대꽃 가슴팍에 안고 와서

무릎에 얹어놓고 살대를 깎던 아버지

벽에 그을린 그림자와 불꽃

 

신배벽 아버지 머리맡에 놓인

가오리연 한 채

툇마루에서 날리며 나는 울었다

대나무밭 위로 뜬 연

바람 잦아들어

달그늘 지는 새파란 잎 사이로 떨어지곤 하여

 

시집은 더 이상 넘겨지지 않았다

가만히 펼쳐진 채 묘혈처럼 깊었다

바람은 잦아든 지 오래라고

손으로 짚으며

그의 대꽃 같은 침목을 읽어왔다고.

 

아비의 손가락

드나들던, 채소밭

밭흙을 몇 줌 그 위로 뿌려주었다 *

 

* 황혼

아버지 삼우제 끝나고

식구들, 산소에 앉아 밥을 먹는다

 

저쪽에서 불빛이 보인다

창호지 안쪽에 배어든

호롱불

 

아버지가 삐걱 문을 열고 나올 것 같다 *

 

* 불꽃

역 광장에 시위가 한창인데 바리케이드 한쪽에서 노인이 신문지를 수의처럼 덮고 잠들어 있다 노숙견

한 마리가 다리를 절룩이며 다가와 수의 바깥으로 삐져나온 노인의 손을 핥는다 노인의 깊게 파인 손등에

내리쬐는 저 불꽃이야말로 세계와 삶에 대한 고요한 항의다 *

 

* 다림질하는 여자

한순간의 의지에 집중된

그녀의 어깨는 사원처럼 단단하다

식탁에 바랜 꽃무늬 원피스를 펼쳐놓고

그녀는 선명해질 때까지 다리고 다린다

굵어진 손마디 속 우물

여자는 오므라진 꽃을 피운다

우물 속 파문을 기억해내려 꽃을 피운다

동심원의 중심에서

별을 핥는 짐승 한 마리

그녀의 손등에 뛰어오른다

다림질을 하는 방 안에 김이 오른다

여자의 손등에도 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그녀의 어깨까지 줄기가 뻗어 오른다

 

식탁에 꽃무늬 원피스를 펼쳐놓고

여자는 다림질을 한다

손등에 새겨진 검버섯

우물 속처럼 깊다

그 속에서 가끔씩 파문이 인다

먼지와 공기까지

그녀는 선명해질 때까지 다리고 다린다

다림질을 하는 방 안에 김이 오른다

혼자 사는 여자는 꽃을 피운다

근육이 꿈틀거릴 때마다

흐릿해진 시간이 곱게 펴진다

밤의 창문에 달이 떠오르면

그녀의 어깨에서 줄기가 뻗어 오르고

짐승이 매달려 논다

뜰에 바람이 지나가고

열매가 익는 밤

여자의 어깨 위에서 짐승이 내려와

까만 눈으로 어둠을 응시한다

 

보름달이 뜨는 밤엔 달 흔적이 선명해진다

흐릿해진 시간이 펴진다 달에는 우물이 있고

그 속에는 짐승이 까만 눈으로 어둠을 응시한다

가끔씩 더운 김이 달 그늘에 서린다 *

 

* 박형준시집[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학과지성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