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박형준
그 젊은이는 맨방바닥에서 잠을 잤다
창문으로 사과나무의 꼭대기만 보였다
가을에 간신히 작은 열매가 맺혔다
그 젊은이에게 그렇게 사랑이 찾아왔다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그는 그때까지 맨방바닥에서 사랑을 나눴다
지하 방의 창문으로 때 이른 낙과가 지나갔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여자를 기다렸다
그녀의 옷에 묻은 찬 냄새를 기억하며
그 젊은이는 가을밤에 맨방바닥에서 잤다
서리가 입속에서 부서지는 날들이 지나갔다
창틀에 낙과가 쌓인 어느 날
물론 그 여자가 왔다 그 젊은이는 그때까지
사두고 한 번도 깔지 않은 요를 깔았다
지하 방을 가득 채우는 요의 끝을 만지며
그 젊은이는 천진하게 여자에게 웃었다
맨방바닥에 꽃무늬 요가 펴졌다 생생한 요의 그림자가
여자는 그 젊은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과나무의 꼭대기,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 시집
아버지 돌아가신 날
새 시집이 나왔다
평생 일구던 밭 내려다뵈는 무덤가
관 내려갈 때 던져주었다
관 위에 이는 바람
몇 페이지 후루룩 넘어가고
호롱불 심지 탁탁 튀는 소리
건너편 탱자나무 집
달빛에 낭창낭창 휘던 대나무 밭
대꽃 가슴팍에 안고 와서
무릎에 얹어놓고 살대를 깎던 아버지
벽에 그을린 그림자와 불꽃
신배벽 아버지 머리맡에 놓인
가오리연 한 채
툇마루에서 날리며 나는 울었다
대나무밭 위로 뜬 연
바람 잦아들어
달그늘 지는 새파란 잎 사이로 떨어지곤 하여
시집은 더 이상 넘겨지지 않았다
가만히 펼쳐진 채 묘혈처럼 깊었다
바람은 잦아든 지 오래라고
손으로 짚으며
그의 대꽃 같은 침목을 읽어왔다고.
아비의 손가락
드나들던, 채소밭
밭흙을 몇 줌 그 위로 뿌려주었다 *
* 황혼
아버지 삼우제 끝나고
식구들, 산소에 앉아 밥을 먹는다
저쪽에서 불빛이 보인다
창호지 안쪽에 배어든
호롱불
아버지가 삐걱 문을 열고 나올 것 같다 *
* 불꽃
역 광장에 시위가 한창인데 바리케이드 한쪽에서 노인이 신문지를 수의처럼 덮고 잠들어 있다 노숙견
한 마리가 다리를 절룩이며 다가와 수의 바깥으로 삐져나온 노인의 손을 핥는다 노인의 깊게 파인 손등에
내리쬐는 저 불꽃이야말로 세계와 삶에 대한 고요한 항의다 *
* 다림질하는 여자
한순간의 의지에 집중된
그녀의 어깨는 사원처럼 단단하다
식탁에 바랜 꽃무늬 원피스를 펼쳐놓고
그녀는 선명해질 때까지 다리고 다린다
굵어진 손마디 속 우물
여자는 오므라진 꽃을 피운다
우물 속 파문을 기억해내려 꽃을 피운다
동심원의 중심에서
별을 핥는 짐승 한 마리
그녀의 손등에 뛰어오른다
다림질을 하는 방 안에 김이 오른다
여자의 손등에도 꽃들이 피기 시작한다
그녀의 어깨까지 줄기가 뻗어 오른다
식탁에 꽃무늬 원피스를 펼쳐놓고
여자는 다림질을 한다
손등에 새겨진 검버섯
우물 속처럼 깊다
그 속에서 가끔씩 파문이 인다
먼지와 공기까지
그녀는 선명해질 때까지 다리고 다린다
다림질을 하는 방 안에 김이 오른다
혼자 사는 여자는 꽃을 피운다
근육이 꿈틀거릴 때마다
흐릿해진 시간이 곱게 펴진다
밤의 창문에 달이 떠오르면
그녀의 어깨에서 줄기가 뻗어 오르고
짐승이 매달려 논다
뜰에 바람이 지나가고
열매가 익는 밤
여자의 어깨 위에서 짐승이 내려와
까만 눈으로 어둠을 응시한다
보름달이 뜨는 밤엔 달 흔적이 선명해진다
흐릿해진 시간이 펴진다 달에는 우물이 있고
그 속에는 짐승이 까만 눈으로 어둠을 응시한다
가끔씩 더운 김이 달 그늘에 서린다 *
* 박형준시집[생각날 때마다 울었다]-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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