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 - 곽재구
다시 그리움은 일어
봄바람이 새 꽃가지를 흔들 것이다
흙바람이 일어 가슴의 큰 슬픔도
꽃잎처럼 바람에 묻힐 것이다
진달래 꽃편지 무더기 써갈긴 산언덕 너머
잊혀진 누군가의 돌무덤 가에도
이슬 맺힌 들메꽃 한 송이 피어날 것이다
웃통을 드러낸 아낙들이 강물에 머리를 감고
오월이면 머리에 꽂을 한 송이의
창포꽃을 생각할 것이다
강물 새에 섧게 드러난 징검다리를 밟고
언젠가 돌아온다던 임 생각이 깊어질 것이다
보리꽃이 만발하고
마실가는 가시내들의 젖가슴이 부풀어
이 땅 위에 그리움의 단내가 물결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곁을 떠나가주렴 절망이여
징검다리 선들선들 밟고 오는 봄바람 속에
오늘은 잊혀진 봄 슬픔 되살아난다
바지게 가득 떨어진 꽃잎 지고
쉬엄쉬엄 돌무덤을 넘는 봄. *
* 느닷없이 봄은 와서 - 김종해
봄은 화안하다
봄이 와서 화안한 까닭을 나는 알고 있다
하느님이 하늘에다 전기 스위치를 꽂기 때문이다
30촉 밝기의 전구보다 더 밝은 꽃들이
이 세상에 일시에 피는 것을 보면
헐, 나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
봄은 눈부시고 화안하다
사람과 세상이 제 모습을 감추고 있는
긴 긴 겨울밤은
하느님이 아직 스위치를 꽂지 않으셔서
어둡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침 느닷없이 봄은 와서
내 눈을 부시게 한다
* 초봄 - 정완영
내가 입김을 불어 유리창을 닦아 내면
새 한 마리 날아가며 하늘빛을 닦아 낸다
내일은 목련꽃 찾아와 구름빛도 닦으리. *
* 초봄 - 정완영
햇살은 보풀보풀 풀어내는 보푸라기
흙살은 흠씬 자고 눈 비비는 아기 속살
목련꽃 온다는 소문 온 골안에 떠돌아 *
* 봄 - 김기림
사월은 게으른 표범처럼
인제사 잠이 깼다.
눈이 부시다
가려웁다
소름친다
등을 살린다.
주춤거린다
성큼 겨울을 뛰어 넘는다. *
* 봄 - 박영근
하나, 둘 흩날리는 눈송이였다
뒷골목에 몰려 쌓여가는 눈더미였다
흙먼지와 그을음, 쓰레기를 쓰고
한밤중 온통 얼어가는 얼음덩어리였다
어떤 뜨거운 말들이 치웠는지 나는 모른다
맨땅에 선연한 침묵의 빛을 본다. *
* 박영근시집[저 꽃이 불편하다]-창비
* 봄 - 오탁번
소쩍새는
밤 이슥토록 울고
조롱조롱 금낭화
붉은 꽃잎이 짙다//
너비바위 틈에 피어난
개미딸기
오종종 오종종
노란 꽃잎이 여리다//
하늘 높이 뜬
솔개 눈씨에
참새도 오목눈이도
찔레넝쿨 사이로 숨는다//
하느님이
수염에 묻은 황사를 턴다
붕어들이 알 낳느라
몸을 떨며 피 흘린다 *
* 봄 - 오탁번
겨우내 살이 오른 딱정벌레 작은 알이
봄 아침 눈을 뜨고 나무 밑둥 간질일 때
그리움 가지 끝마다 새잎 나며 보챈다
버들개지 실눈 뜨는 여울목 아지랑이
눈물겨운 물거울로 꿈결 속에 반짝일 때
이제야 견딜 수 없는 꽃망울이 터진다
* 봄 - 정지용
외ㅅ가마귀 울며 나른 알로
허울한 돌기둥 넷이 스고,
이끼 흔적 푸르른데
황혼이 붉게 물든다.
거북 등 솟아오른 다리
길기도 한 다리,
바람이 수면에 옴기니
휘이 비껴 쓸리다.
* 봄 - 최윤진
문빈정사
섬돌 위에
눈빛 맑은 스님의
털신 한 켤레
어느 날
새의 깃털처럼
하얀 고무신으로 바뀌었네. *
* 꽃과 꽃나무 - 오규원
노오란 산수유꽃이
폭폭, 폭,
박히고 있다
자기 몸의 맨살에 *
* 봄비 - 노천명
강에 얼음장 꺼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 가슴속 어디서 나는 소리 같습니다
봄이 온다기로
밤새것 울어 새일 것은 없으련만
밤을 새워 땅이 꺼지게 통곡함은
이 겨울이 가는 때문이었습니다
한밤을 즐기차게 서러워함은
겨울이 또 하나 가려 함이었습니다
화려한 꽃철을 가져온다지만
이 겨울을 보냄은
견딜 수 없는 비애였기에
한밤을 울어울어 보내는 것입니다
* 봄의 말 - 헤르만 헤세
* 봄 - 곽해룡
봄은 틀림없이
힘이 셀 거야
할머니한테 끌려다니던 염소
뿔 두 개 달더니
할머니를 끌고 다니잖아
틀림없이 봄은
고집이 셀 거야
봄이란 글자를 잘 봐
뿔 달린 염소처럼
몸 위에 뿔 두 개 달았잖아 *
* 차 한잔 -금당다회 - 박남준
매화가 핀다고
연꽃이 곱다고
산국처럼 물들고 싶다고
눈꽃이 못내 그리웁다고
솔숲 맑은 바람 다관(茶館)에 우려내면
찻잔에 어느새
푸른 하늘 담기네
* 물소리를 꿈꾸다 - 이정록
번데기로 살 수 있다면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
한겨울에도, 뿌리 끝에서 우듬지 끝까지
줄기차게 오르내리는 물소리
고치의 올 올을 아쟁처럼 켜고
나는 그 소리를 숨차게 쟁이며
분꽃 씨처럼 늙어갈 것이다
고치 속이, 눈부신 하늘인양
맘껏 날아다니다 멍이 드는 날갯죽지
세찬 바람에 가지를 휘몰아
제 몸을 후려치는 그의 종아리에서
겨울을 나고 싶다, 얼음장 밑 송사리들
버드나무의 실뿌리를 젖인 듯 머금고
그 때마다 결이 환해지는 버드나무
촬촬, 물소리로 울 수 있다면
날개를 달아도 되나요? 슬몃 투정도 부리며
버드나무와 한 살림을 차리고 싶다
물오른 수컷이 되고 싶다 *
* 참 맑은 물살 -회문산에서 - 곽재구
참 맑은 물살
발가락 새 헤적이네
애기 고사리순 좀 봐
사랑해야 할 날들
지천으로 솟았네
어디까지 가나
부르면 부를수록
더 뜨거워지는 너의 이름
참 고운 물살
머리카락 풀어 적셨네
출렁거리는 산들의
부신 허벅지 좀 봐
아무 때나 만나서
한몸되어 흐르는
눈물나는 저들 연분홍 사랑 좀 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