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배롱나무 시 모음 2

효림♡ 2013. 7. 17. 17:06

 

* 그게 배롱나무인 줄 몰랐다 - 김태형  

오래된 창문 밖에 마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팔뚝만한 누런 가지 사이로
아침마다 마당을 쓸던 늙은 아저씨
말갛게 젖은 겨드랑내가 났다
날이 풀려도 저 나무는 꿈쩍도 않은 채 제 껍질만 벗고 있었다
구렁이가 혹 겁도 없이 하늘로 오르려 했을까
벼락을 맞고는 그만 나무로 말라죽었나 싶었는데
날름 여린 혓바닥을 밀어내고는
뒤늦어서야 어디가 가려운지 샛바람에 잎들을 파르르 떤다
그게 배롱나무인 줄은 몰랐다
그 동안 누가 저 나무 아래 웅크리고 앉아
겨드랑이를 간질이고 갔는지는 모르지만
등줄기가 가려울 때마다 몇 차례 누런 허물을 벗고
딱딱한 비늘에 윤기마저 도는지
세 치쯤 되는 공중이 이내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한다
초여름쯤 여린 꽃망울을 터뜨리기까지
저 나무는 어린 새를 한 마리 잡아먹을 것이다
작은 못물을 다 마셔버릴 듯이
밤낮없이 백 일을 더 울어
바람처럼 제 붉은 꽃을 마저 삼켜버릴 것이다
그게 배롱나무라고 누군가 일러주기 전까지 저 나무는 고요히
제 타오르는 불꽃을 안으로 삭이며 한껏 메말라 있었다

 

* 배롱나무 - 안상학  

겨우내 옷을 벗고 견디는 나무가 있다.

건드리면 툭툭 삭정이처럼 내려 앉을 것 같은 나무

추울수록 맨몸이 도드라져 보이는 배롱나무

 

한겨울 맨몸으로 견딜수록

뜨거운 여름내 휘늘어지지 않고 오히려

꼿꼿하게 꽃으로 붉게 붉게 사는 나무가 있다.

 

* 병산서원 복례문 배롱나무 - 안상학
남들 꽃 피울 때 홀로 푸를 일 아니다

푸름을 배워 나날이 새로워지면

안으로 차오르는 사랑

꽃처럼 마음 내며 살 일이다

벌 나비 오갈 때 간혹 쉴 자리 내주고

목 축일 이슬 한 방울 건넬 일이다

남들 꽃 피울 때 함께 피어

사만 팔만 시간 벌 나비와 함께 울 일이다

함께 춤출 일이다

세상 꽃 다 안 피운다 해도

저 홀로라도 꽃 피우며 살 일이다

때가 되면 푸르름을 여미고 꽃으로 돌아갈 일이다 *

* 안상학시집[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

 

* 배롱나무꽃 - 조선윤 

화무십일홍이요

열흘 붉을 꽃 없다지만

석 달 열흘 피워내어 그 이름 백일홍이라

뜨거운 뙤약볕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꽃봉오리 터지던 날

진분홍 주름치마 나풀거리며

살랑이는 바람결에 살포시

미끈한 속살 내비치는 한여름의 청순한 화신이여!

제 안에 소리없이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도

온몸 다해 다시 피워내어

폭죽처럼 터져 선혈처럼 낭자하다

반들반들한 수피에 붉는 간질나무여

화려한 꽃그늘 밟으며

꽃폭죽 맞으며 여름 가고

꽃카펫 밟으며 가을 온다.

 

* 배롱나무 꽃 - 정진규 

어머니 무덤을 천묘하였다
살 들어낸 어머니의 뼈를 처음 보았다
송구스러워 무덤 곁에 심었던 배롱나무 한 그루
지금 꽃들이 한창이다
붉은 떼울음,
꽃을 빼고 나면 배롱나무는 골격만 남는다
너무 단단하게 말랐다
흰 뼈들 힘에 부쳐 툭툭 불거졌다
꽃으로 저승을 한껏 내보인다
한창 울고 있다
어머니, 몇 만리를 그렇게 맨발로 걸어오셨다

 

* 물 빠진 연못 - 황지우 

다섯 그루의 노송과 스물여덟 그루의 자미나무가
나의 화엄(華嚴) 연못, 물들였네
이제는 아름다운 것, 보는 것에도 질렸지만
도취하지 않고 이 생을 견딜 수 있으랴

햇빛 받는 상여처럼 자미꽃 만발할 제
공중에 뜬 나의 화엄 연못,
그 따갑게 환한 그곳;
나는 세상으로부터 잊혀지고
돌아와야 편한 정신병원 같은 나의 연못,
나는 어지러워서 연못가에
진로(眞露) 들고 쓰러져 버렸네

다섯 그루의 노송과 스물여덟 그루의 자미나무가
나의 연못을 떠나 버렸네
한때는 하늘을 종횡무진 갈고 다녔던 물고기들의
사라진 수면(水面);
물 빠진 연못, 내 비참한 바닥,
금이 쩍쩍 난 진흙 우에
소주병 놓여 있네.

 

* 배롱나무 꽃그늘 아래 - 이지엽 

생이 아름다운 때가 있다면

필시 저런 모습일 게다.
귄 있는 여자의 눈썰미 같은 꽃
잘디잔 꽃술로 낭랑하게
예 예 대답하는
그러다 속상하는 일이라도 생기면
혼자서 짜글짜글 애를 태우다
말간 눈물 뚝뚝 떨구는 


화엄이나 천국도 그러고 보면

멀리 있는 게 아니다
환한 손뼉소리 끝에
온몸으로 내 사랑 밀물져 오는 여름 한낮
장엄이라든가 경건이라든가
그런 사뭇 딱딱해지는 것이 아니라도
흩지 마라 네 슬픔 흩지 마라 얼굴 검게 탄 바람이
여린 가지의 맨살 나붓이 쓰다듬고 가는
그 잠시에 있는 것

 

그러면 거기 수만 송이의 꽃들이

죄다 부르르 떨면서 수만 갈래의 길을
우듬지로 위로 받쳐 올리고
나무들은 혼신으로 몸 바깥에 길을 내면서
여름 한낮은 짱짱해지고 짱짱해져서는
이윽고 보여지는 한 틈으로
시원하게 소나기 한 줄금 뿌리기도
하는 것이니

 

완전한 사랑이란 이를테면 그

소나기 같은 것일 게야
목마름의 절벽에서 비류직하(飛流直下)하며
산산이 깨어지는 물방울
몸과 마음의 경계를 깨끗이 지우는 일
몸도 잊어버리고 몸이 돌아갈 집도 다 잊어버리고
그게 우수수 목숨 지는 것인 줄 다 알면서도

 

여름 내내 명옥헌 꽃 지는 배롱나무

여자의 환한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 배롱나무 사원 - 김지헌 

신흥사에 가보니

사람들이 이곳에 오는 이유는 딱 하나

배롱나무에 힘껏 제 것을 박아 넣은

적송을 보기 위함이라


나는 그 희한한 광경을 이쪽저쪽

줌을 맞춰가며 카메라에 담는데


근처 해산당과 세트로 기를 받으면

왕건 같은 아들 하나 점지해 준다니

천년 고찰에서

이종교합 불륜을 부추긴다?


한여름 땡볕의 고요가

어쩐지 불길하기만 한데

꽃 피는 일이 일생의 전부인 배롱나무가

제 속엣껏 모두 퍼주고

공즉시색

 

속이 텅 비어가자

부신 햇살에 잠자던 솔 씨 하나가

눈 뜬 것이리라

그래서 죽어가던 배롱나무도

이심전심이 된 것이리라

 

* 배롱나무꽃 - 이창수 
창 밖 배롱나무에 핀 꽃이 붉다. 부끄럼을 잘 탄다고 어렸을 적 작
은형은 배롱나무 둥치를 살살 간지럽히곤 했다. 손가락을 대려는 시
늉만 해도 사지를 뒤채는 배롱나무에 백일 동안이나 꽃이 머문다. 껍
질도 없이 나무껍질에 숨어 사는 벌레도 없이 매끈하고 단단한 나무
에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온몸을 뒤흔드는 민감한 가지에 꽃이 피어
나고 있다. 예민한 것들은 쉬 져버리는 습성을 배신하며,

비를 맞고 있는 배롱나무의 꽃이 진다. 허공보다 깊은 침묵을 흔드
는 나뭇가지에서 붉은 반점이 떨어진다. 예민한 것들이 져버린 뒤, 푸
른 몽오리가 가지 끝으로 올라온다. 가지마다 피고 지는 다른 시간을
꽃으로 매달고 배롱나무가 흔들린다. 가장 가느다란 가지 끝 붉은 반
점이 떨어지고 있다 벌레 한 마리 숨기지 못하는 여린 마음으로, 어릴
적 작은 상처 하나 감당 못하며,

 

* 詠紫薇花 - 송강 정철 
一園春色紫薇花

纔看佳人勝玉釵

莫向長安樓上望

滿街爭是戀芳華

- 자미화를 노래함 
봄빛 가득한 동산에 자미화 곱게 펴
예쁜 얼굴 옥비녀보다 곱구나
망루에 올라 장안을 바라보지 마라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모두 다 네 모습 사랑하리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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