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詩 모음

송기원 시 모음

효림♡ 2013. 5. 28. 21:34

* 꽃이 필 때 - 송기원 

지나온 어느 순간인들

꽃이 아닌 적이 있으랴.

 

어리석도다

내 눈이여.

 

삶의 굽이굽이 오지게

흐드러진 꽃들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지나쳤으니. *

 

* 찔레꽃  
처음부터 어려운 길인 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대를 잊는 일이 하도 깊어서
어질머리 흔들리는 봄날 저녁이면
갈 수도 돌아설 수도 없는 그런 지경에서
꿈결같이 사람 냄새를 맡곤 하였습니다.
한 번 돌고, 두 번 돌고, 또다시 도는
그런 산모롱이 아래 아늑한 곳에서는
개 짖는 소리, 된장국 냄새, 밥 짓는 연기 속에서
마을의 불빛들 하나 둘 밝게 켜지고
처음부터 어려운 길인 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대를 잊는 일이 하도 깊어서
갈 길도 돌아설 길도 모두 어둠 속에 묻혀버릴 때
그대 대신에 느닷없는 수천 수만 찔레꽃 송이들
무언(無言), 무언으로 피어올랐습니다.
그렇게 그대 대신에 피어올라서
돌아설 한 가닥 외길 비추어주었습니다. *

* 꽃시그림집[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꽃이여]-램덤하우스중앙

 

* 복사꽃

갓난애에게 젖을 물리다 말고

사립문을 뛰쳐나온 갓 스물 새댁,

아직도 뚝뚝 젖이 돋는 젖무덤을

말기에 넣을 새도 없이

뒤란 복사꽃 그늘로 스며드네.

차마 첫정을 못 잊어 시집까지 찾아온

떠꺼머리 휘파람이 이제야 그치네. *

 

* 해당화

목소리에도 칼이 달려, 부르는 유행가마다
피를 뿜어내던 어린 작부
붉게 어지러운 육신을 끝내 삭이지 못하고
백사장 가득한 해당화 터쳐나듯
밤바다에 그만 목숨을 던진 어린 작부 *

 

* 배꽃

건너 배밭에는 배꽃들이 한창이어서

해종일 벌나비들이 잉잉거리네

밭일을 하다말고, 젊은 과수댁

고쟁이 까서 소피 볼 때

홀연히 어지러워라

해종일 잉잉거리는 벌나비만이 아니라

삼년 넘게 굳게 닫힌

이녁의 자궁 안에 난만한 것들! *

 

* 모란

그럴 줄 알았다

 

단 한번의 간통으로

하르르, 황홀하게

무너져내릴 줄 알았다.

 

나도 없이

화냥년! *

 

* 영산홍

내가 너를 더듬고

네가 나를 더듬어

온 산에 무더기를 이룬다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열흘이 아니라

찰나간에 스러진들 어떠랴.

스러져, 바닥 모를 허공으로

붉게 사라진들 어떠랴 *

 

* 치자꽃

보길도 윤선도 유적지 옆에는 작은 초등학교가 있는데요.  

남해안 땅끝에서도 더 아래로 내려온 섬학교답게

아열대성 상록수들만 무성한 화단이 있는데요.  

화단에 가득가득히 치자꽃들이 한창이어서

교정 전체가 치자꽃 향기에 싸여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를 벗어나 들샘머리에 이르러

두 손으로 샘물을 길어 올렸더니

넘쳐나는 치자꽃 향기가 손바닥에도 고였습니다.

 

들샘머리 콩밭에서 김을 매던 할머니가

잠깐 일손을 놓고 나에게 말을 걸어왔는데요.  

"쩌그 뾰족산에 가먼 섬들이 가랑잎처럼 둥둥 떠있고

이쁜 디가 많은디 육지 사람덜은 몰르고 가뿌러라우."  

일흔 가까운 주름살 투성이로 수줍게 웃어 보이는

할머니의 얼굴에서도 치자꽃 향기가 풍겨왔습니다.  

그대여, 얼마나 오래 숨어살면서 그대에게 가는 길을 찾아야

그대는 치자꽃 향기처럼 나에게 풍겨올른지요.

* 송기원시집[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랜덤하우스중앙

 

* 저녁 
새의 그림자가 길게 끌로 가는 것은 누구일까
땅거미가 야금야금 갉아 먹는 것은 무엇일까
붉은 옷의 승려가 사는 서녘에서는
마지막 시체가 연기를 피워 올리고
떠난다거나 다시 돌아온다는 것도
이미 먼 세상의 일이다
서른세 번, 망자를 거두는 종이 울리면
어렵사리 네가 붙잡은 나마저 사라진다

* 송기원시집[저녁]-실천문학사

 

* 물방울 

물방울로 현현할 수도 있을 거다.

 

물이면서도 물을 벗어난,

실체이면서도 실체를 느끼지 않는,

비었으면서도 빔을 드러내지 않는,

건듯 환상의 무지개로 빚어내는,

종내는 주검이듯 펑, 터진 줄도 아는,

 

저 가볍게 허공을 떠도는 것들의 현현. *

* 송기원시집[저녁]-실천문학사

 

* 유용(有用) 

옥양목 속치마가 빨랫줄에서

하얗게 바래고 있네.

누가 아꼈다가 꺼낸 기다림일까.

내 마지막 남은 살점이 거기에 달라붙어

오래전의 희미한 무늬가 되네.

자세히 보니, 연한 분홍빛의

모란꽃으로 활짝 피고 있군.  

내 살점의 마지막 유용이라면

몇 도만 더 조도(照度)가 밝아도 좋을 걸.

그렇게 이승에서의 살냄새도

몇 도만 더 뚝뚝, 모란꽃에 스며들 걸.

누군가의 기다림을, 내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도 알아볼 수 있게. *

* 송기원시집[저녁]-실천문학사 


* 송기원시인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1974년 [동아일보]신춘문예-시, [중앙일보]신춘문예-소설 당선, 1993년 동인문학상, 2001년 오영수문학상 수상  

-시집[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마음속 붉은 꽃잎][단 한번 보지 못한 내 꽃들][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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