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따뜻한 흙 - 조은

효림♡ 2013. 4. 12. 09:09

* 사랑의 위력으로 - 조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당신들의 말마다 모래가 날고 있다 언제나 이곳이 가파른 때문인가 내 곁에 쌓인 모래들만 비탈져 오늘도 반짝인다 지쳐 누운 낙타인가 이 모래 언덕을 허물며 버둥대는 저것은 나를 꿈꾸게 할 것들은 수시로 문을 걸고 꺽꺽 울고 어두운 곳에선 별을 치부처럼 들추며 날렵하게 당신들의 달이 살찐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이 세상에서 사랑의 위력으로 날고 있는 모래의 말들아
사랑이 깊고 깊어 내가 있는 곳으로 올라오지 못하는 *

 

* 따뜻한 흙  

잠시 앉았다 온 곳에서

씨앗들이 묻어 왔다

씨앗들이 내 몸으로 흐르는

물길을 알았는지 떨어지지 않는다

씨앗들이 물이 순환되는 곳에서 풍기는

흙내를 맡으며 발아되는지

잉태의 기억도 생산의 기억도 없는

내 몸이 낯설다

언젠가 내게도

뿌리내리고 싶은 곳이 있었다

그 뿌리에서 꽃을 보려던 시절이 있었다

다시는그 마음을 가질 수 없는

내 고통은 그곳에서

샘물처럼 올라온다

씨앗을 달고 그대로 살아보기로 한다 *

* 조은시집[따뜻한 흙]-문학과지성사

 

* 생의 빛살 
고속도로변 아파트 밀집 지역을 지나며
집집마다 흘러나오는 불빛에 마음 흔들린다
그 동요가 너무 심해
앞만 보고 운전하던 언니가 돌아보며
무슨 일 있었냐고 묻는다

아무 일 없었다, 잘 지냈다, 했지만
삼십 년 넘게 같은 방을 쓰다가 늦게 결혼한
언니는 한동안 묵묵히 있다가
또 묻는다

나는 늘 순도 높은 어둠을 그리워했다
어둠을 이기며 스스로 빛나는 것들을 동경했다
겹겹의 흙더미를 뚫는
새싹 같은 언어를 갈망했다

처음이다. 이런 마음은
슬픔도 외로움도 아픔도 불빛으로
매만지고 얼싸안는
저 무리에서 혼자 떨어져
몸이 옹관처럼 굳어가는 것 같은

몸이
생의 빛살에 관통당한 것 같은 *

 

* 어떻게 알았을까

어린 새 한 마리 둥지에서 떨어졌다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어떻게 알았을까
삶을 박차는 쾌감

숲은 칙칙한 그림자를 포개고 있다

그림자가 짙은 곳에는
밝디밝은 꽃들
꽃 위에서 끝나는
보풀 같은 길들

어린 새는 부리를 내려 쉼표를 찍는다 

보드라운 새의 깃털이
마냥 행복한 눈꺼풀처럼 
떨다 멈춘다 *

 

* 꽃과 꽃 사이

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과 꽃 사이에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도드라지게 아름다운 꽃들은

그 거리가 한결 절묘하다

 

꽃과 꽃 사이 꿀벌이 난다

안개가 피어오른다

해와 달의 손길이 지난다

바람이 살얼음을 걷으며 분다

 

향기가 어둠의 계단을

반짝이며 뛰어 오르내린다

 

봉긋해지는 열매들은

서로의 거리를

앙큼하게 좁힌다

 

* 동질(同質)
이른 아침 문자 메시지가 온다
-나지금입사시험보러가잘보라고해줘너의그말이꼭필요해
모르는 사람이다
다시 봐도 모르는 사람이다

메시지를 삭제하려는 순간
지하철 안에서 전화기를 생명처럼 잡고 있는
절박한 젊은이가 보인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신도 사람도 믿지 않아
잡을 검불조차 없었다
그 긴장을 못 이겨
아무 데서나 꾸벅꾸벅 졸았다

답장을 쓴다
-시험꼭잘보세요행운을빕니다! *

* 조은시집[생의빛살]-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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