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 다 저녁 때의 초록 호수 - 고재종
이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지만
아직도 숲속 골짜기에는
산 절로 물 절로 하는 호수들이 있긴 있는
것이다. 마을 뒷산 속에 있는
그 중 하나를 나는 황혼 무렵이면 찾는데
늘 산영이 잠겨 푸르게 물들어버린
호수 위로 우선 밀잠자리며 실잠자리들
편대지어 날아오르고
아무런 욕심이 없어야만 열릴 것 같은
깊고 그윽하고 투명한 숲속의 호수는
물위에서 제 몸을 잽싸게 튀기는
소금쟁이로도 잔물결 가득 일으킨다.
어디 그뿐인가, 온몸이 남빛인 물총새는
쏜살같이 물속에 뛰어들어 첨벙!
소리가 채 나기도 전에 물 밖으로 나오는데
그 긴 부리에는 이미 노란 버들치나
은빛 피라미가 물려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삐르르삐르르 하고 우는
호반새들이 이따금 노래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런 것들이 온갖 살아 있는 움직임이라고
떠벌릴 것까지는 정말 없지만
호숫가 갈대를 헤치며 다니는 물뱀들이
스르르 옆으로 미끄러져 오자
순간 푸드드득, 창공으로 차고 오르는
물오리떼의 그 찬연한 비상과
이윽고 다시 고요를 찾은 수면에
은비늘 금비늘 마구 뿌려 대는 저녁 햇살은
정말 그 누구의 조화 속이 아니고서
무엇이던가, 이윽고 숲바람 일렁이면
온갖 살아 있는 것들이 진저리치도록
싱그러운 오르가슴에 떨고 마는
여름 다저녁 때, 내가 이 숲속의
산 절로 물 절로 하는 호숫가에서
이제라도 시인으로 숲으로 오라고 한다면
저기 암수가 나란히 물을 미는
원앙처럼, 어딘가에서 우리네 연인들도
벌써 서로의 생명의 입 속으로
뜨거운 혀를 밀고 있긴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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