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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만대장족경 - 유홍준

효림♡ 2013. 7. 17. 16:46

* 팔만대장족경 - 유홍준  

고향집 장독대에

이제는 다 채울 일 사라져버린 서 말가웃 장독 하나가 있다

흘러내린 바지춤을 스윽 끌어올리듯 무심코 난초 잎을 그려넣은

장독 앞에서 팔만 개의 족적을 본다

반죽을 다지고 또 다졌을 팔만 개의

발자국소리를 듣는다

누가 한 덩어리 흙 위에

저만한 발자국을 남겨

제 발자국을 똘똘 뭉쳐 독을 짓는단 말인가

천도가 넘는 가마 속에서

발갛게 달아올랐을

발자국이여

뒤꿈치여

 

단 한번이라도

저 독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면 나는

대시인이 됐을지도 몰라

간장이 익어 나오는 걸 봐

부정(不正)이라고 못 익히겠어 천벌이라고 못 익히겠어

콧물 훔치듯 난초 잎을 올려 친

팔만대장,족경이여  *

 

* 백년 정거장  

백년 정거장에 앉아
기다린다 왜 기다리는지
모르고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잊어버렸으면서 기다린다 내가 일어나면
이 의자가 치워질까봐 이 의자가
치워지면 백년 정거장이
사라질까봐
기다린다 십년 전에 떠난 버스는
돌아오지 않는다 십년 전에 떠난 버스는
이제 돌아오면 안된다 오늘도 나는 정거장에서 파는
잡지처럼 기다린다 오늘도 나는 정거장 한구석에서 닦는
구두처럼 기다린다 백년 정거장의 모든 버스는
뽕짝을 틀고 떠난다 백년 정거장의
모든 버스는 해질녘에 떠난다 백년
정거장의 모든 버스는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바닥이 더러운 정거장에서
천장에 거미줄 늘어진 정거장에서
오늘도 너는 왜
기다리는지......
모르면서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르면서 기다린다 *

* 유홍준시집[나는 웃는다]-창비

 

* 상가(喪家)에 모인 구두들 
저녁 喪家에 구두들이 모인다
아무리 단정히 벗어놓아도
문상을 하고 나면 흐트러져 있는 신발들  
젠장, 구두가 구두를
짓밟는 게 삶이다
밟히지 않는 건 亡者의 신발뿐이다
정리가 되지 않는 喪家의 구두들이여
거건 네 구두고
저건 네 슬리퍼야
돼지고기 삶는 마당가에
어울리지 않는 화환 몇 개 세워놓고
봉투 받아라 봉투,
화투짝처럼 배를 까뒤집는 구두들
밤 깊어 헐렁한 구두 하나 아무렇게나 꿰 신고
담장 가에 가서 오줌을 누면, 보인다
北天에 새로 생긴 신발자리 별 몇 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