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詩

황홀한 국수 - 고영민

효림♡ 2013. 7. 16. 14:51

* 옛날 국수 가게 - 정진규  

햇볕 좋은 가을날 한 골목길에서

옛날 국수 가게를 만났다

남아 있는 것들은 언제나 정겹다

왜 간판도 없느냐 했더니

빨래 널듯 국숫발 하얗게 널어놓은 게

그게 간판이라고 했다

백합꽃 꽃밭 같다고 했다

주인은 편하게 웃었다

꽃 피우고 있었다

꽃밭은 공짜라고 했다 *

* 정진규시집[본색]-천년의시작  

 

* 흰 국숫발 - 장철문 

슬레트 지붕에 국숫발 뽑는 소리가
동촌 할매
자박자박 밤마실
누에 주둥이같이 뽑아내는 아닌 밤 사설 같더니

배는 출출한데 저 햇국수를 언제 얻어먹나
뒷골 큰골 약수터에서 달아내린 수돗물
콸콸 쏟아지는 소리
양은솥에 물 끓는 소리

흰 국숫발, 국숫발이
춤추는

저 국숫발을 퍼지기 전에 건져야 할 텐데
재빠른 손에 국수 빠는 소리
소쿠리에 척척 국수사리 감기는 소리

서리서리 저 많은 국수 누가 다 먹나
쿵쿵 이 방 저 방
빈 방
문 여닫히는 소리

아래채에서 오는 신발 끌리는 소리
헛기침 소리


재바르게 이 그릇 저 그릇 국수사리 던져넣는 소리
쨍그랑 떵그렁 부엌바닥에 양재기 구르는 소리
솰솰솰솰
멸치국물 우려 애호박 채친 국물 붓는 소리


후르룩 푸루룩
아닌 밤 국수 먹는 소리


수루룩 수루룩
대밭에 국숫발 가는 소리 *

 

* 황홀한 국수 - 고영민 
반죽을 누르면 국수틀에서 국수가 빠져나와
받쳐놓은 끓는 솥으로
가만히 들어가
국수가 익듯,

익은 국수를 커다란 소쿠리째 건져
철썩철썩, 찬물에 담갔다가
건져내듯,

손 큰 내 어머니가 한 손씩 국수를 동그랗게 말아
그릇에 얌전히 앉히고
뜨거운 국물을 붓듯,
고명을 얹듯,

쫄깃쫄깃, 말랑말랑
그 매끄러운 국숫발을
허기진 누군가가
후루룩 빨아들이듯,

이마의 젖은 땀을 문지르고
허, 허 감탄사를 연발하며 국물을 다 들이키고 나서는
빈 그릇을 가만히 내려놓은
검은 손등으로
입가를 닦듯,

살다 갔으면 좋겠다

 

* 국수 - 권혁웅  

  넓은 마당 옆에 국수집이 있다고 내가 말했던가 우리 이모네 집이다 저녁이면 어머니는 나를 그리로 마실 보내곤 했다

  우리는 국수보다 삼양라면이 좋았는데 이를테면 꼬불꼬불한 면발을 다 먹고 나서야 아버지는 상을 엎었던 것인데

  국수 뽑는 기계는 쉴새없이 국수를 뽑았다 동어반복을 거기서 배웠다 목포는 항구고 흥남은 부두지만

  국수는 국수다 국물을 우려내는 멸치처럼 나는 작았고 말랐고 부어 있었다 나는 저녁마다 국물 속을 헤엄쳐 다녔다

  어느 날 아버지가 고춧가루를 뿌렸다 좋아요 형님, 다신 안 와요 보증을 잘못 섰다고 한다 거길 떠난 후에

  내가 먹은 국수는 어머니가 반죽해서 식칼로 썰어낸 손칼국수다 면발이 빼뚤빼뚤해서 이모네 국수처럼 가지런하지 않았다

내가 보증한다

  그때 내가 좋아한 건 이틀에 한 번씩 오는 번데기 리어카와 솜틀집 문에 치여 죽은 병아리 그리고 전도관의 풍금소리,

  결단코 국수는 아니었는데

  그 후로도 눈이 내렸다 밀린 연탄재를 한 길에 내다버릴 수 있다고 어머니가 좋아하던 그 눈, 국수가 나올 때

  그 위에 뿌리는 밀가루처럼 하얗고 퍽퍽한 그 눈, 우리는 면발처럼 줄줄이 넓은 마당에 나오곤 했던 것인데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진하게 우려낸 하늘은 무엇인가 번데기처럼 구수하고 병아리처럼 노랗고 풍금의 건반처럼

가지런한 이것은 무엇인가  

* 백석의[국수]에서

 

* 국수 -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연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옛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여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굴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