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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의 연(緣) - 류시화

효림♡ 2013. 7. 12. 17:38

* 모란의 연(緣) - 류시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몇 번이나
당신 집 앞까지 갔다가 그냥 돌아선 것을
이 모란이 안다

 

겹겹의 꽃잎마다 머뭇거림이

머물러 있다
당신은 본 적 없겠지만
가끔 내 심장은 바닥에 떨어진
모란의 붉은 잎이다
돌 위에 흩어져서도 사흘은 더
눈이 아픈

 

우리 둘만이 아는 봄은
어디에 있는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소란으로부터
멀리 있는

 

어느 생에선가 내가
당신으로 인해 스무날하고도 몇 날
불탄 적이 있다는 것을
불면의 불로 봄과 작별했다는 것을 *

 

* 돌 속의 별

돌의 내부가 암흑이라고 믿는 사람은
돌을 부딪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에 별이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노래할 줄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은
저물녘 강의 물살이 부르는 돌들의 노래를
들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노래를 들으며 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직 모르는 사람이다
돌이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은
돌에서 울음을 꺼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 냉정이 한때 불이었다는 것을 잊은 사람이다
돌이 무표정하다고 무시하는 사람은
돌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안으로 소용돌이치는 파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무표정의 모순어법을 *

 

* 낙타의 생

사막에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
등에 난 혹을 보고 나서야
내가 낙타라는 걸 알았다
눈썹 밑에 서걱이는 모래를 보고서야
사막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옹이처럼 변한 무릎을 만져 보고서야
무릎 기도 드릴 일 많았음을 알았다
많은 날을 밤에도 눕지 못했음을 알았다
자꾸 넘어지는 다리를 보고서야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는 걸 알았다
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을 보고서야
무거운 생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왔음을 알았다 *

 

* 달개비가 별의 귀에 대고 한 말
오늘 나는 죽음에 대해 회의를 갖는다
이 달개비, 허락 없이 생각의 경계를 넘어와 지난해
두세 포기였는데 올해
마당 한 귀퉁이를 다 차지했다

뽑아서 아무 데나 던져도 흙 근처
마디에서 뿌리를 내리는 이
한해살이풀의 복원력
단순히 죽음의 소멸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연약한 풀이 가진
세상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
그것이 나를 긍정론자이게 만든다

물결 모양으로 퍼져 가는 유연함
한쪽이 막히면 다른 쪽 빛을 찾아 나가는 본능적 지성
다른 꽃들에 변두리로 밀리면서도 그 자신은
중심에 서 있는 존재감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불에 덴 것처럼 놀라는 인간들과는 사뭇 다르다

나는 장미가 이 닭의장풀보다 귀하다는 것을 안다
신의 눈에는 그 반대일 수 있다는 것도
달개비의 여윈 손목을 잡고 해마다
두꺼비와 가시연꽃과 붉은가슴도요새가 나온다
무당벌레와 흰올빼미도 나온다

오늘 나는 달개비에 대해 쓴다
묶인 곳 없는 영혼에 대해
사물들은 저마다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한다
나비가 태어나는 곳이나 생각의 틈새에서 자라는
이 마디풀에게서 배울 점은 다름 아닌
신비에 무릎 꿇을 필요
신비에 고개 숙일 필요 *

*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새는 비상을 위해 뼛속까지 비우는 실존으로
과거는 창백하게 타들어 간 하루들의 재로
광부는 땅속에 묻힌 별을 찾는 사람으로

누군가를 사랑 한다는 것은
그 사람 가슴 안의 시를 듣는 것
그 시를 자신의 시처럼 외우는 것
그래서 그가 그 시를 잊었을 때
그에게 그 시를 들려주는 것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보게 되는 선물로
목련의 잎은 꽃의 소멸로
죽음은 먼 공간을 건너와 내미는 손 으로
오늘 밤의 주제는 사랑으로 *

* 내가 아는 그는

내가 아는 그는
가슴에 멍 자국 같은 새 발자국 가득한 사람이어서
누구와 부딪혀도 저 혼자 피 흘리는 사람이어서
세상 속에 벽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 일생을 벽에 문을 낸 사람
이어서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마시는 사람이어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 속의 별을 먹는 사람이어서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지평선 같은 사람이어서
그 지평선에 뜬 저녁 별 같은 사람이어서
때로 풀처럼 낮게 우는 사람이어서
고독이 저 높은 벼랑 위 눈개쑥부쟁이 닮은 사람이어서
어제로 내리는 성긴 눈발 같은 사람이어서
만 개의 기쁨과 만 개의 슬픔
다 내려놓아서 가벼워진 사람이어서
가벼워져서 환해진 사람이어서
시들기 전에 떨어진 동백이어서
떨어져서 더 붉게 아름다운 사람이어서
죽어도 죽지 않는 노래 같은 사람이어서 *

 

* 류시화시집[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문학의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