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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느티나무가 - 신경림

효림♡ 2014. 5. 20. 21:39

* 먼 데, 그 먼데를 향하여 - 신경림 

아주 먼 데.
말도 통하지 않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먼 데까지 가자고.

 

어느날 나는 집을 나왔다.
걷고 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몇날 몇밤을 지나서.

 

이쯤은 꽃도 나무도 낯이 설겠지,
새소리도 짐승 울음소리도 귀에 설겠지,
짐을 풀고

 

찾아들어간 집이 너무 낯익어,
마주치는 사람들이 너무 익숙해.

 

사람 사는 곳
어디인들 크게 다르랴,
아내 닮은 사람과 사랑을 하고
자식 닮은 사람들과 아웅다웅 싸우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매화꽃 피고 지기 어언 십년이다.
어쩌면 나는 내가 기껏 떠났던 집으로
되돌아온 것은 아닐까.
아니 당초 집을 떠난 일이 없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다시,

 

아주 먼 데.
말도 통하지 않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먼 데까지 가자고.

 

나는 집을 나온다.
걷고 타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몇날 몇밤을 지나서. *

 

* 당당히 빈손을 

버렸던 것을 되찾는 기쁨을 나는 안다.

이십년 전 삽십년 전에 걷던 길을

걷고 또 걷는 것도 그래서이리.

고목나무와 바위틈에 내가 버렸던 것 숨어 있으면

반갑다 주워서 차곡차곡 몸에 지니고

 

하지만 나는 저세상 가서 그분 앞에 서면

당당히 빈손을 내보일 테야.

돌아오는 길에 그것들을 다시 차창 밖으로 던져버렸으니까.

찾았던 것들을 다시 버리는 기쁨은 더욱 크니까. *

 

*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

나는 지금도 산비알 무허가촌에 산다

수돗물을 받으러 새벽 비탈길을 종종걸음 치는

가난한 아내와 함께 부엌이 따로 없는 사글셋방에 산다

문을 열면 봉당이자 바로 골목길이고
간밤에 취객들이 토해놓은 오물들로 신발이 더럽다
등교하는 학생들과 얼려 공중화장실 앞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잠에서 깬다

지금도 꿈속에서는 벼랑에 달린 달개방에 산다
연탄불에 구운 노가리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는
골목 끝 잔술집 여주인은 한쪽 눈이 멀었다
삼분의 일은 검열로 찢겨나간 외국잡지에서
체 게바라와 마오를 발견하고 들떠서
떠들다 보면 그것도 꿈이다

지금도 밤늦도록 술주정 소리가 끊이지 않는
어수선한 달동네에 산다
전기도 없이 흐린 촛불 밑에서

동네 봉제공장에서 얻어온 옷가지에 단추를 다는

가난한 아내의 기침 소리 속에 산다

도시락을 싸며 가난한 자기보다 더 가난한 내가 불쌍해

눈에 그렁그렁 고인 아내의 눈물과 더불어 산다

 

세상은 바뀌고 바뀌고 또 바뀌었는데도

어쩌면 꿈만 아니고 생시에도

번지가 없어 마을 사람들이 멋대로 붙인

서대문구 홍은동 산 일번지

떠나온 지 마흔해가 넘었어도

가난한 아내와 아내보다 더 가난한 나는

지금도 이 번지에 산다

 

* 나의 예수 

그의 가난과 추위가 어디 그만의 것이랴.

그는 좁은 어깨와 야윈 가슴으로 나의 고통까지 떠안고

역 대합실에 신문지를 덮고 누워 있다.

아무도 그를 눈여겨보지 않는다.

간혹 스치는 것은 모멸과 미혹의 눈길뿐.

마침내 그는 대합실에서도 쫓겨나 거리를 방황하게 된다.

 

찬 바람이 불고 눈발이 치는 날 그의 영혼은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걸어올라가 못 박히는 대신

그의 육신은 멀리 내쫓겨 광야에서 눈사람이 되겠지만.

 

그 언 상처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도

사람들은 그가 부활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다시 대합실에 신문지를 덮고 그들을 대신해서 누워 있으리라는 걸.

 

그들의 아픔, 그들의 슬픔을 모두 끌어안고서. *

 

* 다시 느티나무가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터무니없이 작아 보이기 시작한 때가 있다.

그때까지는 보이거나 들리던 것들이

문득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나는 잠시 의아해하기는 했으나

내가 다 커서거니 여기면서,

이게 다 세상 사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향엘 갔더니,

고향집 앞 느티나무가 옛날처럼 커져 있다.

내가 늙고 병들었구나 이내 깨달았지만,

내 눈이 이미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진 것을,

나는 서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느티나무가 커진 눈에

세상이 너무 아름다웠다.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멀어져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더 아름다웠다. *

 

* 초원(草原) 

지평선에 점으로 찍힌 것이 낙타인가 싶은데
꽤 시간이 가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무토막인가 해서 집어 든 말똥에서
마른 풀냄새가 난다.

 

짙푸른 하늘 저 편에서 곤히 잠들었을
별들이 쌔근쌔근 코고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다.

 

도무지 내가 풀 속에 숨은 작은 벌레보다
더 크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내가 가서 살 저세상도 이와 같으리라 생각하니
갑자기 두려워진다.

 

세상의 소음이 전생의 꿈만 같이 아득해서
그립고 슬프다.
 

* 별   

나이 들어 눈 어두우니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서울 하늘에 별이 보인다

 

하늘에 별이 보이니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고

 

풀과 나무 사이에 별이 보이니

사람들 사이에 별이 보인다

 

반짝반짝 탁한 하늘에 별이 보인다

눈 밝아 보이지 않던 별이 보인다 *

 

* 신경림시집[사진관집 이층]-창비,2014